그의 고향은 경남 진주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 마을이다. 집안의 재산이라곤 600여평의 논이 전부였다. 삼시세끼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사형제는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부모님의 교육열이 그만큼 높았던 것. 70년대 전국의 대학가는 학원자유화 및 민주화 열풍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부산도 예외가 아니었다.그의 동료들은 매일 스크럼을 짜고 연병장을 돌며 거리 투쟁에 나섰지만 그는 나설 수가 없었다. 언감생심,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데모는 꿈도 꾸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창원에 있는 동명중공업에 입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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